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단 편집) == 침투 과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f0087688_4aeafc10e7dc2.jpg|width=100%]]}}}|| || 좌초된 [[상어급]] [[잠수함]]을 조사하는 [[잠수함사령부|한국해군 잠수함 승조원]]들과 내부 수색을 위해 투입된 [[해군 특수전전단|UDT/SEAL]] 대원들. || 침투한 무장공비는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정찰국]] 직속 정찰조 3명과 정찰국 해상처의 안내조 및 전투공작원(무장공비), 그리고 잠수함 승조원 등 총 26명으로, 상어급 잠수함으로 침투하였다. 이들 중 가장 핵심적인 대남침투요원은 정찰조원들로서, 잠수함 기간요원들은 물론이고 안내조를 비롯한 전투공비들은 작전을 시작한지 빠른 시간내에 진압이 되었지만[* 대개 단독 행동을 하다가 사살 혹은 생포되었다. 쓸데없이 규모가 커봐야 눈에 잘띄고 물자 소비만 많아진다.] 정작 제일 중요한 정찰조원 3명 중에서 초기에 사살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한 달 반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으며, 우리 측 전사자들은 주로 이들에 의해서 발생했다.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카메라에서 해당 지역의 [[군단]] 사령부나 비행장 그리고 도로 같은 주요시설을 촬영한 사진이 나온 점으로 볼 때, 이들의 목적이 앞으로의 전쟁을 위하여 한국군의 군사시설들과 지리 따위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연안함대는 최신예 호위함인 [[인천급 호위함]], [[대구급 호위함]]들이 나오기 전이었던 2010년대 전까지만 해도 대잠능력이 취약해 [[제7기동전단]] 및 [[잠수함사령부]] 그리고 [[미합중국 해군]]의 지원이 불가피 했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파동과 함께 허약한 한국 해군력의 현 주소가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포항급]] 초계함과 [[울산급]] 호위함이 주력(둘 다 대잠능력이 전무했다.)인 해군의 현실이 도마에 올랐고, 이후 KDX사업이 추진되고 잠수함 건조도 이루어져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세종대왕급 구축함]], [[손원일급 잠수함]] 등의 첨단전력을 확보하고 강화되어 이제는 해군력만으로도 해안경계가 커버되고 육군은 보조 역할로 바뀌었다. 다만 [[포항급]] 초계함과 [[참수리급 고속정]]이 더 많은 연안함대들은 그래도 부족한 대잠전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것을 교훈삼아 [[와일드캣]] 등 대잠 작전헬기 도입과 강력한 대잠능력도 탑재된 [[인천급]] 배치1, [[대구급]]이 건조되어 배치되고 그 후속으로 인천급 배치3 또한 배치가 될 예정이고 이후 [[KDDX|차세대 구축함]]이나 기존 주력 구축함들의 개량 및 후속사업에서도 대잠능력 탑재 및 추가 혹은 보완이 되었고, 대잠 초계기 [[P-8]]도 도입이 확정되어 해군의 대잠전력이 이전에 비해 크게 개선되고 전력을 갖추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아군의 평소 해안 경계태세 및 대남도발 상황발생시 초동조치 등에 취약한 문제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적에 대한 '''좌초된 잠수함을 최초로 발견한 후 보고가 지휘 체계대로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 초병이 잠수함이 있다고 보고를 했는데 상급부대에서 믿질 않았다. 민간인(택시기사)의 신고를 받고서야 믿게 된 것이다.] 아군의 대응이 늦어지는 바람에 조속한 포위망 구축 후 무장공비들을 조기에 소탕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일을 키우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실수'''였다. 그리고 전면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령 계급의 장교[* [[제3군단]] 제303기무부대장이었던 오영안 대령]가 전사한 것도 대간첩작전치고는 큰 손실이었다. 조기 포위망 구축과 소탕에 실패하여 작전기간과 범위가 확대되는 바람에 임업과 관광업이 주 산업이었던 강원도 지역민들의 생계 활동이 위축되어서 이로 인해 강원도민들이 입은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기준 약 2,000억원 추정] 간첩이 침투하던 과정은 다음과 같다. * 1996년 9월 14일 5시, 해당 잠수함은 침투 작전을 위하여 함남 퇴조항을 출항 공해로 우회 이동하였다. * 9월 15일 1시, 대포동 해안가에 도착하여 잠수함을 해저 정박하였다. * 같은 날 21시, 안내조 2명과 함께 인민무력부 소속 정찰조 3명이 침투 상륙하였고, 안내조는 다시 잠수함으로 복귀했으며, 정찰조는 [[강릉공항]]및 레이더 기지, 항만, [[화력발전소]]를 정찰/촬영하였다. * 9월 16일 21시, 잠수함은 사전 침투한 정찰조의 복귀를 위해 [[대포동]] 해안가에 다시 침투하여 연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공해상 해저에서 대기하였다. * 9월 17일 23시, 재연결을 시도하다가 좌초되었으며,[* 좌초된 이유는 잠수함 함장이 파도가 높아 돌아오는 공작요원들이 지쳐서 돌아올때 힘들겠다고 걱정하여 해안 2km내로 접근하게 했다가 암초에 걸렸다. 북한군의 침투규정에는 잠수함은 해안으로부터 2km 밖에서 정찰국 공작원들을 출구시키고 입구시키게 되었다.] 함장의 명령으로 보안 물품과 서류 등을 파기한 뒤, 그들은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에 상륙하였다. * 9월 18일 1시 30분, 잠수함 폭파/자침을 시도 이후, 공작원들과 승조원들이 잠수함에서 이탈, '''상륙'''함으로써 사건은 시작되었다. 잠수함은 근처 68사단 해안 경계 초소에 의해 관측되어 선보고되었다. 이후 택시기사 이진규 씨와 경찰에 의해서도 발견신고가 접수되었다. 그러나 신고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진위여부 확인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바람에 상부로의 보고와 대응판단이 늦어졌고, 이는 초동조치 지연으로 이어져서 이 사건의 치명적인 단초가 된 조기 포위망 구축에 실패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후 [[연대장]]과 [[사단(군대)|사단]] [[정보참모|정보과장]]까지 출동하여 현장을 감수한 후에야 적 잠수함이 침투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단 지역과 [[제1야전군사령부]] 전 지역에 [[전투준비태세|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 당시 침투 경위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아군 해안경계 태세의 문제를 지적, 비판하는데 치중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택시기사 이진규 씨가 단독으로 좌초 잠수함을 발견하여 신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68사단 초소에서도 좌초 잠수함을 이미 발견하여 감시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제 만나러 갑니다(프로그램)|이제 만나러 갑니다]] 505회에서 이 작전에 참가했던 예비역 원사는 "군에서 잠수함을 미리 발견했지만 발견지점이 소초와 통신이 안되는 지역이라 초병이 도보로 소초까지 걸어가는 것을 이진규 씨가 발견한 것이다."라는 증언을 했다. 다만 무장공비에 의한 잠수함 상륙이라는 근래 초유의 사태[* 과거엔 잦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오랜만에 있던 사건이었다.]를 믿을 수 없어서 신중을 기하느라 현장을 재차 엄밀히 확인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보고와 초동조치가 늦어졌을 뿐이다.[* [[제23보병사단]]으로 입대한 사람들은 아주 잘 확인할 수 있다. [[소대장]]에서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급까지는 보고가 거의 1시간 단위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그 위부터는 일사천리로 쭉쭉 보고된다.] 사실 당시에도 해안 초소에서 초동 발견, 보고했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언론과 여론은 이를 그냥 군의 면피용 뻥 정도로 여겼다. 워낙 군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시절이고, 무엇보다 경찰이 이진규의 신고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역으로 이진규가 영웅시 되었던 탓이다. * 9월 18일 16시 40분, 강릉시 강동면에서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2명이 정찰국 해상처 소속 안내조원인 [[이광수(1965)|이광수]]를 체포하였다. 비슷한 시각인 17시에는 68사단 수색대대에 의해 항공에서 이루어진 수색 및 정찰 중 정찰조에 의해 처형당한 공비의 시신 11구를 발견했다. 사실 명목상으로는 좌초된 책임을 물어 처형한 건데, 군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는 인원 제거'''가 된다. 전투력도 없는 인원 살려둬봤자 식량만 축내고 더군다나 적에게 잡힐 경우 자기네 정보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어 위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타수, 함장, 부함장 등 진짜 좌초에 책임있을만한 인원들은 나중에 전사하거나 생포되었고 좌초와 아무 관계가 있을리 없는 [[정치장교|정치지도원]] 소좌는 여기서 시신이 발견됐다. 결과적으로 [[전투원]]이 비전투원을 몰살시킨 것이 된다. * 초기에 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공비들이 사용하다가 놓고 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물품이나 무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육로를 택하게 되어 공비들도 매우 당황했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